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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레즈비언의 커밍아웃

거울공주 2006. 10. 14. 13:40
 한국 레즈비언의 커밍아웃
■ 최진숙 기자 | <여성신문>
■ 1996.08.18 | 1999.10.29

"자 애인을 만나고 싶은 분은 차례로 나와 주십시요.한 분씩 번호를 달아 주세요. 아, 네. 여기 번호표가 있습니다. 자 몇 분이죠. 하나, 둘, 셋, 넷…… 모두 열 분이군요. 자,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떨려요."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오늘 꼭 애인을 만나면 좋겠어요. 함께 외국 여행가고 싶어요" "레스보스에는 처음이지만 꼭 행운을 잡을 거 같아요"

대단한 꿈이시군요. 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반드시 상대를 만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자리를 통해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는 것, 아시죠? 자 그러면 오늘 밤 행운의 레즈비언 커플은 탄생될 수 있을런지 기대됩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가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문하생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문학과 예술을 향유했던 섬 레스보스. 이 섬의 이름을 본 딴 우리 나라 최초의 레즈비언 카페 레스보스에서는 10일 저녁 "싱글의 밤"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서 싱글인 레즈비언들은 혹시 상대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사회를 맡은이는 이해솔(가명 29)씨. 레스보스 카페를 만든 장본인. 그리고 우리 나라 최초의 레즈비언 모임인 "끼리끼리" 전 회장이기도 하다.

짝을 찾기 위해 무대 위에 올라 선 레즈비언, 그리고 이들의 미팅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는 레즈비언들 사이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현재 "끼리끼리" 회장인 전해성(가명 29)씨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때 회사를 다니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공개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고 그래서 지금은 세차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오히려 "끼리끼리" 일을 하기에는 세차하는 일이 더 편하다.

'싱글의 밤' 축제 분위기에 다른 레즈비언들과 어울려 한껏 흥을 내어보기도 하지만 오늘밤 텔레비전의 커밍아웃 시간에 그녀는 자꾸 초조해진다. 초조함은 단지 그녀 뿐만은 아니다. 전해성씨 옆자리에 앉은 한다솜(가명 29)·김진아(가명 32)부부 레즈비언이나 한비(가명 21)·이정화(가명 35) 커플 레즈비언도 같은 마음이다. 작년 11월 "끼리끼리" 1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공개적인 결혼식을 올린 한다솜 부부,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함께 부부로 살고 있는 한비 부부는 누구보다도 끼리끼리 사무실을 자주 찾는 사람 중에 속한다. 이들은 전해성씨의 텔레비전 커밍아웃에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레즈비언 최초 공개"라는 선전 문구로 눈길을 끌었던 서울방송(SBS)의 <송지나의 취재파일>. 일부 종교단체는 "청소년에게 좋지 않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며 비난했던 이 프로그램을 다 지켜본 전해성씨는 아무말 없이 일어섰다. 방영전 "떨린다"며 계속 가만 있지 못했던 전해성씨이지만 막상 자신의 텔레비전 커밍아웃 모습에는 좀 담담하다. 언젠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으리라 오랫동안 작정해 왔기 때문인지 이제는 오히려 후련하고 잘 된 일이라는 표정이다. 함께 텔레비전을 지켜본 레즈비언 역시 큰 동요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는 자신들의 삶이 사회적으로 공유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전해성씨처럼 나서서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왠지 모를 자책감을 가지는 것 같기도 하다.

1994년 11월 전해성씨와 다섯 명의 레즈비언이 만든 "끼리끼리"는 11월이면 2주기를 맞는다. 레즈비언만의 모임으로서는 최초인 "끼리끼리"의 전신은 93년 12월 발족한 한국남녀 동성애 인권단체 "초동회(초록은 동색)"와 94년 2월 발족한 "친구사이"이다. "끼리끼리"가 "친구사이"에서 독립한 이유는 다소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다.

레즈비언의 수적 열세라는 문제도 있고 이 때문에 레즈비언의 운동이 게이 운동에 파묻혀 버리고 만다는 문제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해성씨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우리 나라에는 게이 바도 여러 군데 있고 그나마 게이들의 모임은 레즈비언 모임보다 훨씬 자유롭고 활발한 것이 사실입니다. 레즈비언들의 커밍아웃을 위한 적극적인 프로그램이나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끼리끼리로 독립했습니다"

여섯 명의 레즈비언으로 출발해 이제는 회원 1백20명을 확보해 두고 있는 "끼리끼리"는 서울대 동성애자 모임 "마음003", 고대"사람과 사람", 건국대의 "화랑", 연세대의 "컴투게더", 주한 외국인 동성애자 모임 "사포"와 함께 올해 3월 발족한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에 가입돼 있다.

90년대 이후 동성애자 인권을 주장하며 속속 결성된 동성애자 모임의 커밍아웃과 함께 한 축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담론 역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도 하다.

최근 개봉된 동성애 영화는 어김없이 화제가 됐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필라델피아>, <토탈 이클립스>, <보이즈 온 더 사이드>등등. 우리 나라 영화로는 보기 드문 독립 저예산 영화로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로부터 극찬을 받아낸 <내일로 흐르는 강>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동성애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출판계의 동성애 붐도 예외는 아니다. 4월말 영국 바사대 영문학 교수 폴 러셀의 <게이 100>(사회평론)은 1·2권을 합쳐 1만5천 질이 팔렸다. 이 책에서는 게이와 레즈비언 가운데 영향력 있는 동성애자 1백명을 소개해 놓고 있다. 미셸 푸코, 랭보와 베를렌, 록 허드슨, 마돈나, 나이팅게일, 셰익스피어, 차이코프스키, 바이런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동성애가 하나의 문화 상품화되는 현상과 관련해 김호기 교수(연세대 사회학)는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은 이제까지 표현되지 못했던 영역을 과감히 표현해내면서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던 영역의 내용은 그 표현 자체만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동성애 담론도 그러한 의미에서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고 말한다.

이러한 위세 속에서 동성애 문제를 쉽게 접하게 되는 사람들은 이제 동성애라는 주제가 그다지 낯설지 않은 듯한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동성애 담론 속에는 정작 동성애자는 빠져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동성애자라는 주체는 없고 담론만 무성한 채 정작 동성애자의 실상과 삶은 이야기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한비씨는 이렇게 말했다."동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지 모르겠어요. 동성애 논쟁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생활과 어떤 관계라고 하는 것이 있는 지 알 수 없어요"

문화비평가 김성기씨는(서울대 사회학 박사과정) "동성애를 자꾸 말하고 보여준다고 해서 동성애자의 고통받는 현실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의 동성애 담론은 소비주의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로 동성애자를 소외시키고 있는 건 지도 모르죠"라고 말한다.

전해성씨의 텔레비전 커밍아웃은 이러한 담론 속에 파묻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레즈비언들이 사회의 당당한 한 구성원으로서 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의 신호탄이다. 레즈비언 97% 자살 충동 경험과 관련해 김진아씨는"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우리 레즈비언들의 위기의식 때문"이라 잘라 말한다. 이러한 위기 의식 때문에 드러내 놓고 살아가지 못하는 레즈비언의 삶을 이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바램과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레즈비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성씨의 적극적인 커밍아웃을 도운 것이다. 레즈비언도 이성애자들과 같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고 싶어합니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을 사랑할 수 없듯이 동성애자 역시 이성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뿐이지 그 이상 다른 것은 없습니다. 사회에서 이 다름을 인정받고 우리들의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즈비언 운동이기도 합니다."

최진숙 기자

[취재후기]

8일 저녁 7시,"레즈비언과 결혼"이라는 주제의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끼리끼리 사무실을 찾은 레즈비언들은 다들 수다장이였다. 모두들 열띤 분위기로 사랑, 결혼, 자녀 등의 문제를 서로에게 뒤질세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아이를 입양해서라도 기르고 싶어요" "저는 꼭 낳고 싶은데 그럴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고민이에요" "결혼 말고 동거생활이 더 나은 거 같지 않아요?" "결혼하면 너무 행복해요. 평생 함께 살고 싶어요"

토론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잠깐의 뒤풀이를 가졌다. 그러다 자신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한비씨의 선동에 이끌려 우리는 모두 한비·이정화 커플의 집을 찾았다. 아담한 전세집이었다. 실내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권유로 연한 녹색 톤의 분위기를 선택했다고 한비씨는 말했다.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따뜻함이 은근히 스며들었다. 밤을 세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의 모습 어디에도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틀린 곳이 없었다. 단지 여자 둘이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 말고는.

사람들은 영화 <필라델피아>를 보면서 톰 행크스의 죽음에 눈물 흘린다. 그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것에 너무 슬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한없는 동정을 보낸다. 이런 사람들일지라도 정작 내 옆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밝힌다면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아마도 눈물보다는 "설마"하는 생각과 함께 무섭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에는 단지 동성을 사랑하느냐 이성을 사랑하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그 차이가 어느 한 편의 우월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고 있는 이 사회의 오만과 편견이 이제는 한꺼풀 벗겨져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출처 : 여성과사회-동성애
글쓴이 : 생활속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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